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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겉모습만으로 모르는 국보탑, 황복사지 삼층석탑_R
작성자 미녀담당자 (ip:)
  • 작성일 2019-03-01 18: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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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으로 모르는 국보탑,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속에는 황금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접근성 : 좋음 5, 차를 이용해 석탑 바로 앞까지 공터에 주차할 수 있음

형태 :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자격 : 높이 7.3m의 국보 제37

특징 : 탑의 내부에서 순금으로 만든 부처님 2점과

탑을 세운 목적이 명백하고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사리함이 출토됨

 

 

경주시 구황동(옛 구황리)에 자리하고 있어

구황리(구황동)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옛 서라벌 시대의 중심가였던 구황동은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의 임금 ''

들어가는 이름의 절이 9개 여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황복사지터는 경주의 남산(금오산)’이 아닌

낭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를 지나

울산으로 가는 도로의 좌측부분에

(경주도심에서 동남쪽 울산방향) 위치해 있는

'낭산(사적 163)'은 보문동,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누에고치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 낭산 기슭에는 선덕왕릉, 진평황릉 등의

무덤이 있고 사천왕사, 망덕사, 중생사 등의 절터와

황복사 삼층석탑 등의 유물들이 많은

신성한 산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꽃씨잡곡 사장은

이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신성한 낭산에 위치해 있다는 이야기를 확인하고 나서

그 모습이 더욱 더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어떤 모습의 탑일까?' 정혜사지 13층석탑이나,

불국사의 다보탑 처럼 탑의 구조부터가 화끈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몸돌에 인왕상 조각이나 감실 정도 등의

미술학적 가치가 있는 독특한 탑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탐방의 첨 만남은

그런 기대가 몽땅 무너질 정도로

규모도 작고 수수하였다

쉽게 말해 일반적인 경주의 신라석탑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 이제 부터가 진짜구나!'

 

일단 이 탑은 국보37호다.

찾아봐도 신석재로 교체 수리했다는 이야기가 없으니

예전의 석재 그대로인 듯하다.

그리고 해체 후 정비할 때

탑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함과

금으로 만든 손바닥 만한

부처님 앉은 것 (여래좌상, 12.2cm 국보제79,

부처님 서있는 것 (여래입상, 14cm 국보제80)

그리고 다양한 부장품들이 관심을 끌었단다

특히 사리함 뚜껑에 조각되어 있는 글을 통해

이 탑의 연대, 기원과 설치목적 등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정리하면 국보37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사실 모든 탑에서 이런 부장품들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도굴되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부장품을 넣지 않았던

탑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부장품들이 나오게되면

역사적인 스토리가 풍부해지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다행이도 훼손되지 않았던 이 탑에게도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 황제의 복을 기원하는 절이라는

황복사는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웠다고 한다.

효소왕 1(692)에 세워진 탑으로

효소왕의 뒤를이은 성덕왕이

즉위한지 5년 만에(706)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1942년 이 탑의 해체 복원 때

2층 탑신에서 금동사리함을 발견하였으며

금동사리함 뚜껑에 음각된 글을 통해

축탑시기를 확실하게 알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문무왕의 장자인 신문왕, 왕비 신목왕후 그리고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 등 세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장치되었다'는 명문이 각인되어있다.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신문왕은 감은사 탑을 쌓았고

효소왕은 신문왕을 위해서 황복사지 탑을 쌓았을 것이다.

 

이제 공부를 했으니 구경가자~

 




사진. 일단 모든 프로젝트의 출발점!

간판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방향으로 잘 찾아왔다

 





사진. 안내판을 따라 조금 산기슭 쪽으로 차를 몰면

저 멀리 석탑 한 개가 보이는데 공사중(?) 이다!

 



아뿔사~ 당연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발굴공사 기간이란다.

멀리서 보이는 탑의 모습 주변에는

공사판(?)에서 사용하는 푸른색 비닐장판이 깔려있다

경주를 돌아 다니다 보면 가끔씩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요즘은 왕궁쪽(옛반월성) 발굴이 활발하다.

그래도 이 탑의 관람을 제한한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탑 앞쪽에 작은 주차장이 있어 자동차로 접근도 용이한 편이다.

 








사진. 탑돌이를 해봐도 주변 바닥엔 파란색 공사판

(발굴조사) 비닐포장이다. 대략 2018.12.10. 부터 3개월간이다.

 



물론 DSLR 카메라가 아닌 폰카로 찍는 것이다.

배경에 푸른 비닐이 안보이도록 주위를 돌아가면서

찍어보지만 아무래도 탑과의 거리와

탑주변에 빽빽하게 둘려져 있는

푸른비닐을 때문에

이것을 없애는 촬영은 불가능임을 깨닫는다. ㅋㅋ

 








사진. 탑 앞쪽엔 안전줄이 있다.

그래서 공식표지판도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실제로 발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공사판 같은 국보 37호의 모습이 아쉽다.

 



공식표지판을 한번 읽어보자~

국보37호 높이 7.3m,

탑을 세운 목적이 명백하고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위에서 공부했던 내용이 간략히 적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어서

온전히 이 탑에 관한 미술학적 가치에 관한 설명은

사실 부족한 편이다.

창림사지 석탑 그리고 장항리사지 석탑처럼

멋진 조각품들이 조각되어 있거나

다보탑처럼 독특한 형태의 비주얼 석탑이 아니지만

이 나름대로의 건립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몇안되는 스토리가 풍부한 석탑이다.

 

 






사진. 발굴하는 황복사지터에서 볼 수 있었던 새로운 발굴현장,

정리된 미완성 왕릉 석재

 






사진. 무덤의 흙을 지탱하던 비슷한 모양의 돌들이

발굴되어 정리된 모습이란다.

통일실라 시절 왕의 무덤을 준비하던 일도 만만찮은 작업이었으리라~

 



황복사지터 앞쪽에 보면 둥그런 씨름경기장 모양으로

돌들이 나란히 정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첨에 씨름경기장 터인 줄 알았다능~)

접근해 보니 알림판 한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미완성 왕릉의 석재라고 한다.

2016.9.부터 2017.4. 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왕릉에 사용되었던 석재를 모아 이 위치에

임시로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

이 왕릉의 주인공은 효성왕으로

병석(?)에 있을 때 능침을 준비하다가

왕의 유언으로 화장을 하게 되어

조성과정에서 폐기한 되었던 것으로 추정 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비가 끝나서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경주의 많은 다른 왕릉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건축감이 느껴진다.

왕릉의 봉분이 대부분 거대하다 보니

예를 들어 꽃씨잡곡 사장 회사 근처의

진덕여왕릉을 가서 직접 봐도

잘 관리된 잔디정원의 느낌만 있어서

왕릉의 탐방은 매우 지루한 편인데,

이렇게 릉을 구성하는 세트의 돌이

실제로 발견된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이번 탐방은 황복사지 발굴 때문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당당한 모습을 오롯이

관찰하기에 힘이 들었으나

왕릉의 구성하는 석재 등의 또다른 발굴현장을

처음으로 관찰할 수 있어서 딸램과 함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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